최근 진료실이나 응급실에서 자해 시도를 한 청소년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커터칼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손목을 긁어 상처를 내는 경우가 가장 흔하지만, 도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손톱을 날카롭게 뜯어 자해 도구로 사용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대체 자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금하여 물어봐도 심각 한 내적 고통을 호소하기보다는, “그냥 하고 싶어서”, “기분이 좀 나아져서”, “피를 보면 좋아서” 처럼 대충 대답하고는 합니다. 청소년 환자 특유의 충동적이고 피상적인 반응이죠.
너무 걱정되어 우려 섞인 조언을 하려해도 “제 친구들도 많이 하는데, 걔는 왜 정신과 안 오는데요?”라며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사실입니다 . 자해가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지만, 병원을 찾는 경우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SNS 를 조금만 검색해도 수많은 자해 인증 사진이 쏟아져 나오죠. 최근 중앙자살예방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자살유해정보 건수는 전년 대비 43% 증가했습니다. 특히 자살 관련 사진이나 동영상 게재가 작년보다 무려 3,72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SNS를 통해 자해나 자살 정보가 널리 퍼지고, 이를 모방하면서 다시 자해가 늘어나는 악순환입니다.
흔히 자해와 자살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자해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자살 아니냐는 것이죠. 하지만 조사에 따르면, 자해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자살의 의사까지는 없었다고 응답했습니다. 자해만 하는 경우와 자살 시도자의 경우를 비교하면, 우울증 유병률도 서로 달랐죠. 이처럼 자해와 자살은 서로 다 른 현상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자살 의도가 없는 자해 행동을 일컬어, ‘비자살 성 자해(Non-Suicidal Self-injury)라는 독립적인 진단으로 제시하곤 합니다. 물론 자살자의 40~60%에서 자해 행동이 발견되니, 자해 환자의 자살 위험성을 간과해서 는 곤란하겠습니다만.
그럼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나는 청소년 자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자해는 주의를 끌기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상식입니다. 물론 일부 과시형 자해, 즉 자해 장면을 SNS에 적극적으로 올리는 등의 행동이나, 지적 장애가 있는 환자의 경우 는 주의를 끌려는 일차적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신체 부위에 은밀하게 하 는 자해는, 관심을 끌려 는 목적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자신의 정서적 고통이나 불편감을 경감시키기 위한 병적인 대처 기제’가 자해입니다. “ 자해하면 기분이 나아져요”, “그냥 하고 싶어서 했어 요.”라는 아이들의 대답 은 어찌 보면 맞는 이야기인 셈이죠. 그런데 자해를 통해 내적 고통이 일시적으로 줄어든다면, 즉 기분이 나아지고 긴 장이 풀린다면 오히려 문제가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 에서 접근을 시작해야 합니다.
먼저 부정적인 감정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해를 한다는 점을 아이 자신에게 이해시켜야 합니다. 자해 직전에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설명하게 하고, 그 감정을 공감해 주는 것이죠. 그리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건강 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또 이렇게 힘들 때 부모에게 먼저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절대 자해 행동에 대해 섣불리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당황하 거나 화를 내는 부모의 반응을 보면, 대개 아이는 마음을 더 닫아버립니다. 문제를 풀 수 있는 통로가 막혀버리는 것이죠. 부모님은 아이의 어떤 감정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의 괴로움을 들어주면서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미 부모와 자식 간의 감정의 골이 깊은 상황 이라면, 시간이 좀더 필요합니다. 아이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하죠.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리면, 전문가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만약 진지한 자살 의도나 계획이 있는 경우라면, 즉시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수면 습관이나 체중의 현저한 변화가 있는 경우, 학교생활이나 교우 관계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적극 적인 치료를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약물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고, 전문적인 심리상담을 통해 효과적인 정서 조절 전략을 배워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부모와의 갈등이 심각한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경우라면, 부모가 함께 치료에 참여하는 가족 치료도 필요합니다.
가족은 아이에게 자해나 자살 시도에 대해 묻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자해에 대해 괜히 물어보았다가, 공연히 아이의 스트레스가 심해지거나 도리어 자해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꾹 참는 부모님도 있습니다. 혹은 몰래 자해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쉬쉬하는 경우도 있죠. 하지만 자해는 ‘내가 몹시 고통스럽다’는 경고의 신호입니다 . 부모님은 이 신호를 잘 읽어내야 합니다.
어떤 의미 에서는 자신을 도와달라는 무의식적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좋아 집니다. 적절한 개입과 배려, 공감, 치료를 통해서, 상당수의 자해 청소년은 본래의 명랑하고 건강한 아이로 회복됩니다. 부모님이 먼저 희망을 가지고 사랑 하는 자녀를 위해 적극적인 의학적 도움을 찾기 바랍니다.
<본 글은 MEDI CHECK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