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김상일 원장은 아직 젊다. 그러나 주위의 어느 누구라도 인정하듯 그의 병원경영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그가 양지병원에 몸담은 지 불과 16년, 그 기간 동안에 의사 수 20배, 그리고 직원 수 역시 20배 이상이 증가하였다.
의료시설이나 장비는 물론 병원전체의 질과 양적인 성장을 이루어 그의 뛰어난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김상일 원장은 현재 에이치플러스 자립병원 이사장도 겸임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대한병원협회 정책부위원장을 비롯해 서울시병원회와 중소병원협회, 의료법인연합회 총무위원장, 그리고 대한의사협회 정책이사를 맡고 있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김상일 원장으로부터 지난 16년 동안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을 어떻게 성장시켜 왔고, 지금도 그 발전의 고삐를 결코 늦추지 않고 있는 그의 이야기들을 들어 보았다.
제가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에 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혈액종양내과를 전공했기 때문에 비록 양지병원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힘들게 세우신 병원이긴 하지만 이곳에 복귀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양지병원에는 의사 5~6명에 직원 50여 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던 때여서 제가 와서 혈액종양내과를 개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에서 보건행정학을 전공한 동생이 하는 말이 ‘부모님 병원을 둘러보니 상황이 너무 어렵더라’면서 ‘형이 와서 병원을 좀 돌보아야 할 것같다’는 말을 듣고보니 마냥 모른척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돌아와 병원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설립된 지 30년이 된 병원인데도 지역주민들로부터 거의 외면을 당하고 있는 등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의료장비들이 노후화되어 있었고, 조명을 비롯한 여러 시설에도 문제가 있었으며, 직원들의 사기는 당연히 크게 저하되어 환자나 내원객들에 대한 서비스 마인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적지않은 세월을 몸바쳐서 이루신 병원이 이런 상태를 보이고 있다는 데 대해 많이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다할 해결 방법이 없었던 저는 병실과 응급실을 열심히 뛰어다니며 열심히 환자를 진료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종이챠트를 사용하고 있을 때여서 직접 챠팅도 하고, CT실로 뛰어가서 결과를 확인하는 등 모든 것을 몸으로 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처음에는 막막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른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당시 서울대학병원 진료협력실에 근무하고 있던 중학교 동창을 찾아가 서울대학병원과 양지병원이 진료협력체결을 맺을 수 있는지를 타진했는데, 저희 병원을 둘러보고 간 그 친구는 곤란하다는 답변을 보내오더라고요. 저희 병원의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서울대학병원과의 진료협력체결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긴 했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오기가 생기기도 하더군요. 이후 저는 주위에서 잘 운영되고 있는 병원이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방문을 꺼리는 병원은 몰래 가서 살펴보기도 했고요. 그렇게 병원들을 둘러보러 다닌 세월이 거의 1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병원을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른지 제 나름대로의 윤곽이 잡히더군요. 그러면서 당시 저희 병원의 규모나 경영상태로는 다소 무리라는 주위의 말도 있었지만 OCS, EMR, PACS 등의 전산 시스템을 도입해 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본관 인테리어 공사를 했는데 주위의 어떤 분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느냐’며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주위에서 어떤 말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고 저희생각대로 묵묵히 밀고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병원을 찾는 환자 분들은 바뀐 병원 모습을 보시고 너무도 좋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힘입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테리어 공사와 노후화된 장비를 교체해 나갔습니다.
이렇듯 변화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 그나마 50여명에 불과하던 직원들이 계속해서 퇴직을 하고 저희 병원을 떠나갔습니다. 보수가 높고 편한 다른 병원을 찾아 떠나간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제가 이 병원애 처음 왔을 때 있었던 직원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직원은 단 4명에 불과합니다. 이때 내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하는 직원이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며 만류하는 나의 말을 외면하고 매몰차게 떠나가는 것을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떠나가는 직원을 돌려세울 수는 없었기에 이후 빠져나간 직원들의 자리는 제가 직접 인터뷰를 하여 직원을 뽑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뽑은 직원들의 수가 지금은 1천100명에 이릅니다. 또 당시 5명에 불과하던 의사도 지금은 110명으로 늘어나, 저는 양지병원이 불과 16년이라는 길다면 길겠지만,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양과 질적인 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응급실만 해도 제가 이 병원에 처음 왔을 때 1~2병상을 운영했었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병상을 증설하여 지금은 응급의료센터로서 계속해서 A등급을 받으면서 중환자 전문의사 4명이 상주를 할 만큼 확대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중환자 대응능력이 크게 향상된 것이지요. 사실 제 자랑같지만 응급실이 이 만큼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저는 지난 세월을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자다가도 뛰어나와야 하는 일을 되풀이 해야만 했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요.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상황은 홍보실 직원을 별도로 둘 수 있는 입장이 아니어서 제 명함도 제 스스로 명함가게를 찾아가 만들어 써야 했고, 현수막도직접 가서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병실은 처음 제가 왔을 때 150개 였는데 그 때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많은 것 같아 120병상으로 줄여 이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의사와 직원이증원 되다 보니 어느덧 의사 30명에 직원 수가 200명을 훌쩍 넘어버리더라고요. 120병상에 이 만큼의 의사와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인력의포화상태’라는 점에 수긍이 가실 겁니다.
병원 본관건물과 연결되어 있던 땅에 신관건물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부모님과 상의를 했는데 부모님은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병원을 신축할만한 땅을 살펴보는 한편 기존의 병원을 인수하려는 시도도 해보았는데 그것 역시 여의치 않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다시 부모님을 설득해서 2010년 본래 계획했던, 본관과 연결된 대지에 새 병원건물 공사를 시작할 수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신관건물을 완공했지요. 사실 이 신관건물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주위에서 많은 분들이 저희 병원의 경영과 관련해 많은 걱정을 해 주셨습니다.
주위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저는 본관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여 2013년 3월 드디어 ‘그랜드 오픈’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성대하게 그랜드 오픈을 한 저는 물론 저희 병원의 모든 임직원들은 ‘환자들에게 최선의 진료를 제공하여 그야말로 최고의 병원을 만들어보자’는 다짐을 하며 근무에 임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많은 환자들이 찾아 올 것으로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달리 병원은 적자의 수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하더라구요. 병원경영의 이런 어려운 상황은 이후 3년에 걸쳐 계속되었지요. 물론 그 이후라고 해서 경영이 크게 호전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랜드 오픈을 함께 했던 의사 선생님들이 똘똘 뭉쳐서 자발적으로 진료시간을 연장하고, 진료를 마친 후에도 귀가하지 않고 한데 모여 무엇이 잘됐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토론하며 병원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 둘 고쳐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좋은 의사 분들이 영입이 되고 진료시스템도 센터화 되면서 병원의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저에게 ‘언제가 가장 행복했느냐?’고 물으시면 ‘그랜드 오픈을 하고 나서 센터별로 컨퍼런스를 시작 할 때’라고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희 병원은 지금도 병원 내에 컨퍼런스가 많은 병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또 케이스 리포트 뿐만 아니라 여러 학술지에 논문도 많이 게재하고있지요. 저희와 같은 병원은 중소병원에선 매우 드물 것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희 병원의 많은 스탭들이 학회에 적극 참석하고 있고, 좌장급 스탭들도 여러 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요. 그리고 저희 병원은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다든지, 학술대회에서 좌장을 맡은 스탭들에게는 연구비를 지급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숫자가 적을 것으로 예상을 했으나 막상 하다보니 지금은 정말 많은 분들이 이 혜택을 받고 계십니다. 이렇듯 의사들이 공부를 하면서 진료하다보니 병원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더라고요.
현재 저희 병원은 홍보팀과 환자경험관리팀, 감염관리팀 등, 사실 병원에서 직원을 늘이거나 투자를하는데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분야에도 아낌없이 투자를 했던 것이 오늘의 양지병원을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많이 힘이 들긴 했지만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이전의 그런 투자가 정말 많은 힘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종 의료기관인증평가부터 시작해서 적정성평가, 신포괄수가제 도입 등이 제기되었을 때 저희병원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채택했던 것이 병원의 경영을 조속히 안정시키는데 큰 힘이 되지 않았나싶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제는 주위로부터 ‘양지병원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물론 시설이나 장비는 CT나 MRI,PET CT, 본 스캔등과 같은 장비를 도입할 때 가능한한 가장 최신의 것을 채택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것들이 저희 병원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희 병원이 운영하고 있는 ‘의생명연구원’만큼은 저희들 나름대로 많은 자부심을 갖게 하지요. 이 연구원은 10여 년 전에 세워졌
는데, 설립되고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식약청 집계로 현재까지 9년을 연속해서 생물학적 동등성시험을 포함해
임상실험을 전국에서 이루어지는 건수의 거의 2/3가까이 하는 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학병원이 아닌 일반 중소병원에서 이 정도의 시설과 장비, 그리고 100명이 넘는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운영하고 있는 의생명연구원은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100명이 넘는 인력 중에는 7명의 의사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환자진료를 하지 않고 오직 연구에만 전념하고 있지요. 저희 연구원은 독자적인 IRB를 두고
있고, 지금도 임상3상부터 다기관3상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연구원을 세우게 된 것은 저를 이 병원에 오도록 한 동생의 제안에 따른 것이지요. 동생의 이런 제의에 제가 즉각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병원을 한창 키우던 시점에서 장례식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제시되었는데 제가 아는 범위에서 병원이 장례식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에도 병원에 장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와는 그 역할과 기능이 많이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입원해 있던 환자가 임종을 했을 때 장례예식이 있기 전 유족들이 모여 기도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장소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우리나라의 병원 장례식장은 보험진료수가가 워낙 열악하다 보니 경영난을 타개할 목적으로 이미 오래 전에 고착된 우리나라만의 톡특한 문화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런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 병원에 여유로운 땅이 있다면 의사들이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원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어 최종적으로 그의견이 채택된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당시 연구원 설립에 의견을 모은 것은 대단히 잘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의생명연구원이 여러 병원의 밴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희 임상진료과 스탭들 중 임상시험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 IRB에 들어가 계시고, 또 각종 임상현장에서 느끼는 노하우나 문제점 등을 진행 중인 연구에 반영해 좋은 성과를 거두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원들에 비해 의뢰받은 임상시험을 잘 수행함으로써 통과시키는 비율이 크게 높아 임상시험이 지속적으로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임상시험을 수행해 나갈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임상현장의 살아있는 경험과 의생명연구원이 오랫동안 쌓아온 노하우가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코로나19 사태를 언급하지않을 수 없는데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들을 힘들게 했던 것을 돌이켜 보면 이전의 신종플루와 메르스 사태를 들 수 있을 겁니다. 신종플루의 경우는 저희 병원이 비교적 잘 대응할 수 있었는데 메르스 사태는 그야말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전파력 때문에 중소병원들로서는 정말 대응하기에 벅찼습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엄청난 환자감소와 그에 따른 경영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니 그와 비슷한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들로서는 많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이를 피하려 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데 여러 의사들과 직원들이 동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았는데 마침 그 때 보건당국에서 부족한 방호복이나 마스크를 배정하는 가운데 중소병원들은 다소 소외되는 경향이 있어 저희 병원 역시 현장에 근무하는 간호사나 의사들에게 방호복을 지급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코로나19와 관련된 환자를 대하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나타나 이런 문제를 타개할 방법을 찾던 중에 제가 우연하게 BSC라는 생물학적 안전대에 착안해서 공중전화박스 크기의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서 환자와 의료진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라면 방호복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안전하게 진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것이 바로 이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모았던 ‘워크스루’ 부스인 것이지요.
물론 처음에는 저로서도 확신이 들지 않아 병원창고에서 몇 차례 시제품을 만들어 보곤 했는데 그러다가2020년 3월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게 되면서 감염내과만으로는 대응하는 것이 벅찰 것으로 판단이 되어 다른 임상과 스탭들까지 동원해 선별진료소에 나가 환자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 때 제가 과감하게 그동안 시제품으로 만들었던 ‘워크스루’ 부스를 갖고 나와 직접 환자진료에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 첫 번째환자는 저희 병원에서 첫 코로나19 감염자로 확진이된 직원으로서 제가 ‘워크스루’ 부스를 활용해 직접 검사를 시행했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것이지요. 이렇듯 제가 맨 손으로 환자를 대하는 것을 보고 저희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이 ‘워크스루’ 방법의 안정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4대의 ‘워크스루’ 부스를 만들어코로나19 사태에 효율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워크스루’ 부스의 안전성이 확인되었다고는 하지만 의료진의 안전을 위해 방호복을 완벽하게 갖추도록 한 것은 당연한 일이였고요. 그리고 이런 사실은 국내·외 언론들에게 알려지면서 여러 나라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 왔습니다.
사실 저희가 ‘워크스루’ 부스를 하나 만드는데 만족하지 않고 환자가 한번 검사를 받고 난 후 직원이 그 내부에 들어가 철저히 소독하고 환기시키는 일을 너무 힘들어 해서 그 내부소독이나 환기가 전자동으로 이루어지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업체를 만나보기도 했는데 어느 곳 하나 선뜻 나서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좌절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많은 직원들이 지혜를 모아 뜻하던 바를 이루어낼 수 있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3.5 버전의 워크스루, 환자 안전장치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을뿐만 아니라 터치스크린으로 작용이 가능한 전자동 시설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시설은 현재 국내 여러 병원들은 물론 외국의 병원에도 설치되
어 운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워크스루의 특허에 관해 잘 몰랐었는데 흔히 자체의 기술이나 노하우를 지키기 위해 오히려 특허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허를 내게 되면 일정 기간이후 기술을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저희 병원에서 개발한 워크스루가 우리나라 병원들은 물론 외국의 여러 병원들이 필요한 경우 제작해 사용할 수 있도록 저는 특허를 출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점 저희 병원의 모든 임직원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요.
사실 경영적 측면에서 보면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이후 다른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수가 줄어들어 병원을 운영하는데 적지 않게 힘이 들었지만 다행히 저희 병원은 신포괄수가제를 도입해 적용하기시작했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그에 따른 도움을 받을수 있어 오히려 전년도인 2019년에 비해 경영이 크게 나빠지지 않아 코로나19 이후 대다수 병원들이 받은 지원금을 받지 않고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저희 병원이라고 해서 다른 병원들이 겪는 어려움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고 하지만 발빠른 제도도입 등으로 인해 다른 많은 병원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에이치 플러스 양지병원’을 전국에 널리 알리는 홍보효과를 나타내기도 했지요. 무엇보다 우리 병원이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 크게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많은 국민, 특히 지역주민들의 인식에 저희 병원을 깊이 각인시켜 지속적으로 병원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일 겁니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이후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점은 이런 사태가 발발하기 이전의 행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희 병원의 경우 환자경험관리팀이나 홍보팀, 감염관리팀 운영에 중점을 두고 관리해 온 것이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장벽을 타고 넘는데 큰 힘이 되지 않았나 하는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위 일각에서 ‘무엇때문에 그런 관리부서에 공을 들이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저는 코로나19라는 거대한 리스크를 이겨내는데 엄청난 힘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 병원은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이전부터 ‘시설환경라운딩회의’를 개최해 왔고, 이 회의를 통해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대한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하면서, 그에 따른 전산프로그램을 만들어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코로나19가 발발했을 때 저희 병원이 당황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성환 기자)